가난과 행복

우리는 대개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적어도 가난해 지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난에 대해서는 적어도 두가지를 기억해 두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가난한 것과 부유한 것은 기준의 문제다.

돈과 행복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이같은 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이 시대에 더더욱 절실한 것이 되었는데 그것이 내년이 될지 십년후가 될지는 모르고 또 미래는 모르는 거니까 (아주 작은 가능성으로) 그런 일은 영영 안일어날지도 모르지만 관점에 따라서 경제적 대파국이라고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조만간 일어날 가능성은 아주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래에서 쓰겠지만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만은 볼수 없다.

모두가 부자가 된다는 모순

아래가 없으면 위가 없다. 그러니까 모두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마치 아래가 없는데 위가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40년전에는 자동차를 가진 사람은 부자였다. 그러니까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 기준으로 모든 가정이 자동차를 가지는 그런 부자가 되는 나라를 만듭시다라는 것이 그때의 목적이었다면 우리는 거의 그런 부자나라가 된 셈이다. 

그러나 굶어죽는 수준의 가난에 이르지 않는다면 가난과 부유함은 대부분 상대적인 것이다. 40년전의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던 경차타기를 지금 할수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은거의 없다. 사실 한국 사람은 대부분 세계의 빈민국에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부자라고 할수 있다. 

모두가 부자가 될수 없다는것은 21세기에 이르러 단순히 가난이란 단어의 의미이상의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한국사람을 포함한 5-10%의 부유한 세계인들이 생각하는 당연한 수준의 소비라는 것이 온 세계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제 미국보다 더 중요한 시장이 되어가고 있다. 중국사람에게 물건을 팔려고 자동차공장을 세우고 티브이 공장을 세운다. 그러나 그 중국인구가 모두 미국사람은 커녕 한국사람 소비하듯하기도 불가능할 것이다. 에너지가 없고 소비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처리할 수가 없다. 그렇게 많은 식량을 만들어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참치 초밥이 유행하면 참치가 씨가 마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계는 이미 비좁다. 

미국 일본 유럽 할거없이 모든 부자나라들은 다 대단한 규모의 빚을 지고 있다. 돌아보면 부자나라들이 살아온 방식은 돈을 돌리고 돌려서 모두가 부자가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고 그래서 더 많은 소비를 하게 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부동산 거품이나 주식도 그러하고 고갈이 예정된 국민 연금 같은 것도 그렇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결국 허공에서 돈을 만들고 미래에서 돈을 가져와서 돈을 만들어서는 쓰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이 부자라는 착각에 빠져 더 많은 것을 소비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돈은 어디에 있는가. 그돈이 은행에 있건 집에 있건 채권에 있건 심지어 현금으로 있건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돈은 어느정도 유령이다. 우리는 아이엠에프때 이미 그런 것을 겪었고 세계역사에서도 독일에서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나 일본에서의 부동산 거품붕괴 같은 경우 그걸 보여주었다. 

산업화가 모두를 부자만들어 줄 수 있다던 꿈은 파산이 목전에 있다. 지구나 환경, 자원이 물리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욕망과 소비와 인구증가는 무한대로 일어날수 있지만 자원은 제한되어 있다는 점때문이다.  산업화로 모두가 부자되고 모두가 행복한 미래는 만들 수 없다. 

사람들은 임박한 경제난의 이야기를 하면 대개 그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다거나 그런 일을 안일어나게 할수는 없는가라고 묻는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히 거대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물론 적어도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다.

카지노에서 돈을 잃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다가가서 이제 당신은 곧 모든 신용을 다써버리고 도박도 하지 못하게 될거라고 말한다고 하자. 그는 흥청망청 사치하는 것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도박을 안하게 되는 것이 비극이라고만 할수 있을까? 우리는 안간힘을 다해서 계속 그 사람이 도박을 할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지구상의 인구를 생각하면 인간의 소비수준은 너무 높다. 지속가능한 삶이 되려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어떤 방식으로 평가해도 우리는 가난해 져야 한다.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그 가난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상적인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대개 범죄일 수 밖에 없다. 전세계 인구를 1%수준으로 낮춘다던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가난에 빠뜨려 불행하게 만듬으로써 자신들의 소비수준을 지키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에는 물이나 전기 도로같은 것을 독점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거둬가는 자본의 이야기가 이미 흔하다. 이 모두가 결국 부자들의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은 이미 있을 수 없다. 전쟁과 착취가 아니면 소비수준의 유지는 불가능하고 그나마 그 둘다 현실성이 없다. 전쟁은 모두를 죽일 것이고 착취는 얼마가지 못할 것이다. 

사실 우리앞에 있는 이런 일은 이전에 없었던 것도 아니다. 우리는 왕조가 끝나고 공화국에 살고 있는 우리, 민주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그 왕가나 귀족층의 기준에서 보면 공화정이니 민주화니 하는 것은 몰락이요 가난해 지는 것이다. 모두가 왕처럼 귀족처럼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몇만평, 몇십만평쯤 하는 땅을 가지고 거기에 성같은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모두가 경복궁같은 집 수십채를 짓고 살기는 불가능하니까 지금 살고 있는 이런 세상이 만들어 진것이다. 이번에는 모두가 부자나라의 부유층처럼 소비하면서 살수는 없기 때문에 부자나라의 부유층의 소비수준은 끌어내려질 차례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어차피 그리 오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돈과 행복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소식만은 아니다. 돈과 행복은 반드시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소비하는데 중독된 현대인들은 더 많은 소비를 해도 결코 내적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 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법정스님이 무소유 같은 메세지로 이런 이야기를 이미 한 적이 있다. 

결국 행복은 외적인 것 이상으로 내적인 것에 달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취직을 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 결국 취직을 해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행복해 지기 때문이다. 그런 공부가 나쁘고 돈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공부가 온전히 돈을 위한 것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암암리에 행복은 결국 돈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행복이 결국 돈이니 우리는 가족에게도 사기를 친다. 친척에게 사기를 치고 자식이 부모에게 사기를 치고 언니가 동생에게 사기를 친다. 인간은 자기 합리화에 능한 동물이라 이런 저런 변명을 스스로에게 늘어놓지만 솔직히 말하면 사기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를 사회로부터, 가족에게서 갈라놓는다. 사회공동체와 신뢰는 파괴되고 상식도 파괴된다. 남에게 호혜를 베풀때도 결국 관심과 사랑보다는 돈을 준다. 아이에게 비싼 사교육을 시켜주고 유학을 시켜준다면 그것으로 아이에게 많은 것을 희생한 부모가 된다고 생각한다. 남편도 아내에게 돈을 주고 아내도 남편에게 돈을 요구한다. 

공부와 사색이란 애초에 돈을 벌기 위한 것 이상으로 자신의 내부를 위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커다란 위기가 왔을 때 물론 경제적 타격을 견뎌내기 위해 우리는 돈과 물질이 필요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준비된 자기 내부다. 철없고 서로에게 관심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룩된 가족에게 위기가 닥친다면 그 가족은 금방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질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공부는 누가 가져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기공부란 무엇인가. 그게 뭔지 내 의견을 여기에 한두줄로 적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같다. 한두줄을 읽어서 그게 뭔지 알것 같으면 그런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일 것이다. 다만 그것은 체력이나 건강관리처럼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집을 짓고 건물을 올리고 마을을 만들지만 마찬가지로 정신세계에서도 집을 짓고 마당을 꾸미고 방을 꾸민다. 그렇게 해서 적어도 세상의 풍파를 피하고 편안히 그 안에 머무를 집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너무 오랬동안 돈과 소비에 대한 메세지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내적인 가난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어느때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요즘이 점점 더 그런 것같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고 미래는 알지 못하며 튼튼해 보이던 세상은 흔들거리고 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의 길에 내몰리고 있는게 현실이다. 개인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차원에서 준비가 미흡할 때 그것은 반드시 아픈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철없는 사람이 있는 가족을 생각해 보라. 그 철없는 자가 그 가족을 어떤 위험에 빠뜨릴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환경적인 격변은 가족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차원에서도 같은 일을 저지르게 만든다.